목화의 씨앗을 감싸는 섬유 뭉치를 따면 목화 솜이 되고 그 솜에서 실을 뽑아내 옷감을 짜면 면직물이 됩니다. 이 면직물로 말할것 같으면 부드러우면서도 내구도가 강하고, 습기를 잘 흡수하는데다가 정전기도 없으며, 인체에 닿아도 자극이 없어서 구김이 좀 생기는것만 빼면 거의 완벽한 직물입니다. 장점이 너무 뚜렷하고 지금까지도 완벽한 대체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합성섬유가 발달한 지금도 살에 닿는 옷감은 웬만하면 면과 혼방하여 사용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목화의 원산지와 전파
목화라는 식물은 남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서 발생하여, 바다를 따라 퍼졌을것으로 추측됩니다. 중앙아메리카, 이집트, 인도 등지의 저위도 지역에서 각각 작물화된 증거가 있지만, 가장 오래된 면직물은 인더스 문명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염색된 천 조각입니다. 무려 4500년전 입니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목화의 재배와 면직물의 발전에는 인도와 그 주변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유럽같은 고위도 지역의 문명권에서는 아주 귀한 재료로 취급되었습니다.
목화의 다양한 기록
이 목화를 중국인들은 희고 부드럽다고 해서 백첩포라고 불렀으며, 로마에서는 바람으로 짠 직물이라해서 ventvs textilis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원료인 목화는 살면서 본적이 없다 보니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 사서에서는 고창국에는 누에고치같은 열매가 열리는 풀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세기 영국의 여행가 존 맨데빌 경은 인도에는 작은 양들이 열리는 식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목화를 가지고도 각각의 문화권마다 다르게 표현했던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 정확히 말하자면 개량된 목화종자를 들여온지 약 100년 뒤 서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인도산 면지굴을 다이렉트로 떼 오면서, 면직물의 유행이 시작됐습니다. 포르투갈이 점령한 도시인 캘리컷에서 수입되는 면직물이라서 이걸 캘리코라고 불렀습니다.
영국과 목화
그리고 시간이 지나 17세기 새로운 해양 대국으로 자리잡은 영국에서는 양모산업을 육성해서 전 세계의 식민지에 판매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값싸고 질 좋은 캘리코가 영국까지 유입이되어 기껏 육성해 놓은 양모 산업이 힘들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1720년 캘리코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관세를 높이는등 캘리코를 견재했지만, 캘리코는 워낙 가성비가 좋아 밀수되는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캘리코 뿐만 아니라 모슬린 과 같은 고급 면직물은 사치품으로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끝내 영국은 양모 뿐만아니라, 면직물 산업도 직접 육성하기로 결정합니다.
영국의 기후에서 목화를 직접 재배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영국은 인도 벵골지방의 토호 세력과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벵골의 목화 산지를 독차지하여 목화솜을 싸고 안정된 가격으로 무한 공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료만 싸게 들여오고 나머지 가공은 영국내에서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산량을 늘려도 면직물의 인기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 높아졌고, 결국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는 지경에 이르러 버리게 됬습니다.
목화와 산업혁명
한국의 전통 베틀처럼 직물을 짜는 기계를 직조기라고 합니다. 그동안 영국인들도 베틀과 대동소이한 수준의 직조기로 면직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733년 플라잉 셔틀이라는 최첨단 베틀이 발명되면서, 면직 산업은 전환기를 맞게됩니다. 이름 그대로 원래는 수동이었던 셔틀이라는 부품을 자동화 시키는 물건이었습니다. 이 물건이 도입 되면서 영국의 직물생산률이 최대 4배까지 증가했고, 영국산 면직물 생산량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폭발은 연쇄작용을 일으켜, 실 뽑는 속도보다 직물 짜는 속도가 더 빨라져 실을 자동으로 뽑는 방직기가 등장합니다. 물레로 실을 뽑을때보다 실 뽑는 속도가 8배나 빨라졋습니다.
실뽑는 속도가 너무 빨라지니 이번엔 실이 남아 돌게돼서 또 직조기가 업그레이드 되고, 직조 속도가 빨라지니 실이 부족해져 또 방적기가 발전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증기기관까지 도입되어 근대적인 공장이 등장하게 된것이었습니다. 면직물 생산량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 폭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산업혁명입니다. 인류사를 통째로 뒤바꿔놓은 대혁명이엇습니다.
자동화를 통해 영국산 면직물의 가성비와 생산량은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는 영국산 면직물들이 역수출되어 인도 면직물 산업을 붕괴시켜버리는 상황까지 초래했습니다. 산업혁명은 이미 북부 프랑스까지 퍼져 자동화 면직물 공장이 우후죽순 세워졌고 인도에서 생산되는 목화만으로는 공급량이 부족한 시점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넘치는 수요를 감당할 새로운 방안으로는 신생 독립군이었던 미국이 급 부상했습니다.
당시 가진것이라고는 비옥한 토지와 화창한 날씨, 흑인 노예뿐이었던 미국에서는 노당 집약적인 담배재배가 성행했었는데 기호품이라 가격이 요동치는 담배보다는 생필품이었던 목화가 훨씬 안정적인 상품이었습니다. 때마침 1793년 미국에서 목화솜과 씨앗을 자동으로 분리해주는 조면기가 개발되었습니다. 조면기는 점차 개량되어 사람 1000명분의 효율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분리 과정이 빨라졋으니 그만큼 목화 꽃 자체를 수확하는 속도도 빨라져야 했습니다.
여전히 목화 꽃 자체의 수확은 사람 손이 필요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 이미 노예제가 폐지된 미국 북부주들이나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수가 오히려 몇배로 늘어낫고 목화솜 생산량도 연간6만kg에서 8260만 kg 으로 1000배가넘게 증가했습니다.조면기와 노예노동을 필두로한 미국 남부의 목화는 1850년이 되면서 영국 목화 수입량의 4분의3이될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세계적인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노예공급이 끊기기 시작하자 남부 공장주들은 노예끼리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해 노예생산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반면 상공업의 발달과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노예의 필요성이 사라진 북부에서는 노예제는 일찍이 폐지되었고 연방차원에서는 노예제를 완전 철폐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커졌습니다.서부 개척이 진행되며 생겨나는 새로운 주들을 자유주로 할것인지, 노예제로할것인지로 하는 문제는 노예제 찬반문제를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그렇게 대립이 첨예하던 1860년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시작해서 미시시피, 플로리다,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일곱개 주가 미 연방을 탈퇴하여 아메리카 연합국 통칭 남부연맹을 결성했습니다.
남북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반란의 완전한 진압과 미합중국의 회복을 목표로하는 연방군과는 달리 남부연맹의 목적은 그저 독립의 인정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전쟁에 개입시켜 북부를물러나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유럽 공장에서 쓰이는 목화 대부분이 미국 남부에서 공급되고, 미국이 둘로 갈라서게되면 힘이 분산되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 입장에서는 좋기때문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북군은 남부의 해상을 봉쇄해 목화의 수출 자체를 막아버렸고, 때마침 융작을 맞은 영국에 오히려 식량 수출마저 두배로 늘려버렸습니다. 옷도 중요하지만 먹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부족한 목화도 이집트나 인도에서 좀더 조달하면 되니, 어느정도 공급량도 충족한상태엿고 노예부리는 반란군을 지원해줄 메리트가 사라졌습니다.
1862년 9월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하면서, 남부연맹편을 들면 진짜 나쁜놈이라는 여론이 생겨 심지어 노예제 옹호국가로 낙인찍히면서까지 남부연맹을 지지하기 힘든 상황을 맞이합니다. 1865년 남군의 항복으로 남부연맹은 다시 미 연방으로 흡수됐고, 노예들은 모두 해방됐습니다. 백인들의 린치나 차별을 피해서 많은 남부 출신 흑인들이 북부로 도망쳤고, 노예들이 지탱하던 목화재배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습니다. 또한 병충해와 허리케인 홍수 등의 자연재해까지 더해지며 미국 목화 농장들은 빠르게 쇠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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