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금나라 침략 시작
1217년, 징기스칸은 호라즘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몽골 주력군을 서쪽으로 배치하엿고 금나라 전선은 무칼리를 왕으로 삼아 정벌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칼리는 단 4만의 병력으로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 대명부를 함락했으며, 방향을 돌려 동주까지 진격했습니다.
징기스칸의 소방수 무칼리
무칼리는 단 4만의 병력으로 모든 지역을 방어하는 동시에 금나라를 멸망 시켜야했습니다. 이때 무칼리는 이전에 징기스칸이 금나라를 정벌할때와 조금 다른 전략을 사용합니다. 몽골이 금나라를 처음 침공할 당시 그들은 함락한 성읍을, 점령하거나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거나 포로로삼는등 지나가는곳을 모두 초토화 시킵니다. 만약 전쟁 초기 몽골군이 함락한 모든 성을 점령하고 또 수성했다면, 병력을 각 성에 나눠야하는데, 그렇게되면 각개격파의 위험이 존재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격파한 수많은 성에 모든 병력을 나누기에는 현실적으로 병력의 수가 부족했습니다. 애초에 기마병으로 수성을 하는것 자첵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모든 군대가 기마병인 몽골군은 군을 굳이 나누지않고 한곳에 모은뒤 아군 지역에 진입한 적과 싸우는 기동 방어를 펼치는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점령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는것은 알겠는데, 금나라의 성과 도시를 초토화 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한 이유인데 함락만 시킨뒤 방치한다면, 결국 금나라의 반격의 여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차피 점령하지 못하는 지역이라면, 초토화를 시켜 금나라의 생산력 자체를 낮춰버리는것이 몽골군에게는 이득이었습니다.
초기 몽골군의 금나라 점령방식은 전쟁의 효율성을 고려하긴 하였지만, 어떻게보면 반쪽짜리 점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금나라 전선을 맡은 무칼리가 더 빛날수있었습니다.
무칼리는 징기스칸의 명에따라 계속해서 징벌을 이어갔습니다. 먼저 1217년 겨울 대명부를 시작으로 치주 익도부 동주 밀주 등을 차례로 평정하며, 반격에 나선 금나라를 다시 압박했고, 1218년에는 태행산 서쪽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전에 요하 인근을 토벌할때처럼, 적의 항복을 받아들였으며 좀더 적극적으로 항복한 인물들을 관직에 배치했습니다.
후유의 제안
한편 후유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동경 방향으로 파견합니다. 이때 후유가 고려의 강동성까지 도망가게 됩니다. 몽골은 동하와 고려의 협조를 요청하였고, 그들은 연합군을 형성해 후유를 섬멸합니다. 무칼리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도륙하며, 태행산 서쪽 지역을 평정해 갔습니다. 1220년에는 무칼리가 단순하지만, 전황을 좀더 유리하게 바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몽골군에 항복했던 한족 출신 인물인 사천예가 무칼리에게 한가지 간언을 하게됩니다.
그는 중원이 어느정도 평정 되었으니 병사들에게 학살과 약탈을 금지시켜 왕으로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무칼리에게 말했고, 무칼리는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직후 함락한 도시들의 약탈과 학살이 멈췄으며, 이전에 사로잡은 노인과 아이들은 모두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근 지역의 금나라 군이 줄줄이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한 도시는 주변 여러 지역의 인구 30만호를 적어 항복하기도 했습니다. 정벌 도중 황릉이라는 산등성이에서 금군 2만명이 무칼리를 기습하기도 했지만 무칼리는 단 500의 병력으로 반격해 금군을 달아나게 했습니다. 무칼리는 금나라를 압박했고 곳곳에서 병력을 흡수하며 군 규모를 계속해서 증가 시켰습니다.
징기스칸과 함께하고 싶었던 무칼리
전선이 어늬정도 안정되자 그는 서쪽으로 향하는 징기스칸의 원정에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지만, 무칼리는 금나라 전선에 계속 집중해주길 원한다며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무칼리는 1223년까지 개봉 일대를 제외한 모든 곡창지대를 점령했으며, 금나라의 공격을 자신이 직접 혹은 부하들을 보내 모두 방어해내는 엄청난 위용을 보여주었습니다. 황하 이남으로 완전히 쪼그라든 금나라는 몽골에 화친을 시도하지만, 몽골군은 그것을 거부하고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같은해 봄에는 무칼리가 금나라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행군 도중 병으로 사망했는데, 그가 쉬지 않고 직접 군을 이끌었던것을 봣을때 사인은 과로사로 추정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슬프게도 남경을 함락하지 못했으니 동생아 니가 이루도록 하라 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금나라가 무칼리에게 허무하게 밀렸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남아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각지에서 끈질기게 저항했던 것을 보았을때, 그것을 모두 진압하고 정복지를 관리한 무칼리는 징기스칸의 소방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금나라 전선은 그의동생이 이어받았고, 전선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갑니다. 그해 겨울 금나라는 선종이 죽고 애종이 즉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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