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 사망 그후
1227년 몽골군이 한차례 서역을 공격하고 되돌아 오며 서하를 공격했는데 이때 정벌중인 징기스칸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서하를 정벌한 몽골군은 다시 금나라 정벌을 재개합니다. 금나라는 다시 힘든 방어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금 애종은 직후부터금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내부적으로 형벌을 강화 했고,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백성들이 국정에 대해 자유롭게 직언하고, 처벌받지 않도록 했으며,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실제로 형벌을 단호하게 집행해 사사롭게 사람을 죽인 황족을 베어죽였으며, 금나라가 망할것이라는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살려주었습니다. 인재는 여럿 기용했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은 명장 완안진화상 이었습니다. 완안진화상은 금나라 장수로,문학에도 능통해 사람들이 수재라고 부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완안진화상이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1225년 그가 장군이었던 형이 아픈 사이에 형 대신 병사 한명을 처벌해 태형으로 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애종은 서쪽에서 병사를 이끌던 형을 봐서라도 진화상을 사면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 하였고 진화상의 형은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이에 애종은 완안진화상을 독단으로 사면시켜줍니다. 그러면서 '너의 형이 죽었으니 내가 명장을 잃어 너를 사면한다.' 내가 법을 어겨 누군가를 나를 나무랄태니 너는 꼭 공을 세워 이 사면이 헛되지 않게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애종은 몽골의 대공세에 대비해 섬서 일대의 장수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방어 문제에 대해 급히 논의했습니다. 또한 섬서 전체에 사면령을 내렸으며, 그해 세금을 면제시켰습니다. 1228년 몽골군 일부가 대창원에 진입했습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자진해 침입한 몽골군과 싸울 선봉에 서게 됩니다. 그는 충효군 400기를 이끌고 대창원으로 향햇는데, 여기서 몽골군 8000여기를 무너뜨려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는 몽골과의 전투에서 단 첫번째 금나라의 승리였습니다.
완안진화상은 이 승리로 엄청난 명성과 높은 벼슬을 받았습니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완안진화상이 이끌었던 충효군은 상당히 특이한 군대였습니다. 충효군은 금나라에 귀순했거나,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 탈출한 여러 유목민으로 구성된 혼성 기병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성격이 사나워 통솔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왕안진화상은 그 다루기 까다로운 부대를 솔선수범해서 이끌었습니다.
이 후 그는 충효군 총령으로서 애종이 직접 종용한 사령관인 완안합달과 일랄포 아래에서 활약했고 1229년에는 아직 황하 이북에 남아있던 영토인 위주에서 또한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몽골군은 1231년부터 오고타이칸의 명령에 따라 더 강화된 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금나라의 방어도 만만치않았습니다. 금나라 수도 개봉은 몽골군의 입장에서는 금처에 진입하는것 조차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수도 바로 위에서는 황화강이 흘렀고 서쪽에는 협곡사이에 동관이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동관을 우회하는것이 불가능하는것은 아니었지만 험한 산을 우회하거나, 남송의 영토를 지나야 했습니다. 동쪽으로는 황하강 중하류를 넘어 올 수 있었으나, 태산이 가로막고있었고, 태산을 우회해도 수많은 강과 호수, 수로 등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어, 기병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애종은 정예병력 대부분을 동관과 하중부 인근에 배치하며 당장 유일한 루트인 서쪽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했습니다. 오고타이의 몽골군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봉상부를 시작으로 경조부를 빼앗고 섬서지역을 모두 차지하며, 하중부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때 수부타이가 직접 동관을 공략하려고 시도 했는대, 완안지화상이 충효군을 이끌고 도회곡으로가 수부타이를 패퇴시켰습니다.
완안진화상의 첫 패배
그의 인생에서 첫 패배였습니다. 이 패배에 대해 오고타이가 직접 수부타이를 책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툴루이는 오고타이의 명령을 받고 동관을 우회하기 위해 한수를 따라 등주 방향으로 진격했습니다. 얼마 뒤 애종은 몽골군의 우회 소식을 듣고 완안합달과 이랄포아에게 대군을 맡겨 몽골군을 막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랄포아의 잘못된 판단으로인해 툴루이의 몽골군이 성공적으로 한수를 도하하며 진입했고 금나라 지역에 진입한 몽골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이 우회해 개봉을 향했다고 판단해 회군합니다.
1232년 1월 금나라 군은 회군하며 엄청난 추위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 회군 도중 균주 인근 삼봉산을 지나며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갑자기 많은 양의 폭설이 내리며 짙은 안개가 삼봉산 일대를 덮었습니다. 금나라 군은 3일동안 이어진 추위와 폭설속에 동상에걸리거나 얼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툴루이가 몽골군 4만을 이끌며 폭설과 추위를 뚫고 금나라 군을 기습하게됩니다. 금나라군은 강추위속에서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금나라 최후의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15만의 병사와 대부분의 장수들이 몰살 당했습니다. 이때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은 삼봉산근처인 균주로 도망치게되고 이랄포아는 툴루이에게 생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황하를 건넌 오고타이가 직접 삼봉산으로 왔으며 균주를 공격해 함락시켯고 이 과정에서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전사하게 됩니다. 이랄포아는 참수당하게 됩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일으켜보기위해 노력한 애종이었지만 그가 지켜온 모든게 날아갔습니다. 금나라가 일어설 마지막 희망은 사라졌고 더 이상 전세를 역전시키는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1232년 3월 수도 개봉과 몇몇성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성들은 몽골군의 손에 넘어갔고 수부타이가 개봉을 포위했습니다. 지방에 남아있던 몇몇 금나라 장수들은 개봉을 구원하고자 군사를 끌고 왔지만 모두 몽골군에게 격퇴당하게 됩니다. 애종은 1233년 1월에 수도 개봉에서 귀덕으로 달아났습니다. 6월에는 귀덕에서 채주로 도망쳤습니다.
11월에는 남송이 몽골과 동맹을 맺고 참전하는데 남송의 명장 맹공이 직접 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몽골군은 남송의 도움으로 황하 이남에서의 보급문제를 말끔히 해결했고, 몽골과 남송 연합군은 애종이 농성하고 있는 채주를 포위했습니다. 1234년 1월 연합군의 압박이 거세지며, 채주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애종은 황가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까지 버텻지만 자신의 굼뜬 몸으로는 더이상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민첩하고 탈출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친위대장이자 황족인 완안승린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위했으며, 자신은 목을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친위대장에서 황제된 완안승린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보려 했지만, 채주가 함락되며 탈출에 실패해 결국 사망합니다. 금 말제로 알려진 그는 황제가된지 몇시간 되지않아 사망한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제위한 황제로 남았습니다. 1234년 몽골은 드디어 금나라를 멸망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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