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탄생 시작
17세기부터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찾아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건너갔습니다. 영국의 북아페리카 식민지는 규모가 계속해서 성장했고 18세기 초가 되면 동부의 총 13개의 식민지가 건설되게 됩니다.
1756년에 일어난 7년 전쟁은 영국과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러시아 등을 상대로 싸운 전쟁 입니다. 영국은 프로이센의 동맹으로 참전했는데 영국의 목표는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로 부터 북아메리카의 지배권을 가져오는것이었습니다. 전쟁 결과 영국은 승리하며 북미와 서 인도제도,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프랑스 식민지들을 접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7년 전쟁이 미국 혁명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영국의 식민지 나라들
7년이라는 긴 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여러 국가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게됩니다. 특히 영국은 해외 식민지가 크게 늘어나 부담이 더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이에 영국은 느슨하게 방임했던 식민지에 통치력을 강화하고 체제를 견고하게 바꾸는 한편 행정비용 충당을 위해 세금을 부과하기로 합니다. 1765년 영구은 신문 팜플릿 달력등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문서에 인지세를 부과했습니다. 영국 의회가 식민지 내부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전례없는 조치였습니다. 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라며 말하며, 영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하고,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대표 없는 곳에 과세 할 수 없다는 것은 식민지인의 대표를 포함하지 않은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과세할 수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식민지 인들은 오직 식민지 의회만이 자신들에게 세금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민지에는 본국에서 파견된 총독이 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각 식민지 의회가 예산을 세우고 과세하고, 관리 임명을 승인하는 등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식민지 사람들은 보통 부동산을 소유하면 투표권이 생겼기 때문에 본토의 시민들 보다 정치 참여하는것에 더 익숙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경험을 하고 있던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도 주지 않은 과세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습니다.
영국의 후퇴
생각보다 식민지의 강한 반발에 영국의회는 인지세법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자신들이 식민지 모두를 대표한다며, 과세를 포함해 식민지에 적용할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선언햇습니다. 이어서 보란듯이 1767년 타운센드 법을 제조하며 유리, 납 종이, 도료, 차,에 관세를 부가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다시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보스턴 항구에서는 군중들과 영국군의 마찰이 있었는데, 돌과 눈덩이에 맞은 한 군인이 지휘관의 명령 없이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를 따라 다른 병사들도 발포해 민간인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당하게 됩니다. 물리적 충돌을 포함해 다시 한번 강한 반발에 부딪힌 영국 의회는 다시 세금을 철폐했습니다. 하지만 의회가 언제든지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차에 대한 세금은 남겨두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
또한 차는 영국 동인도회사에서만 독점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식민지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살마들중 애국자들이 모인 비밀단체 자유의 아들들은 어느날밤 원주민 복장으로 보스톤 항구에 모여 정박중이던 동인도 회사의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영국 의회도 이 사건으로 매우 분노하게 됩니다.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일어난 이 사건으로 영국의회는 이를 본보기로 삼아 응징하기 위해 각종 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의회는 메사추세츠 주 대부분의 선출직과 주지사, 상원의원 등을 영국에서 임명하게 바꿔버렸습니다. 또한, 보스턴 항구를 폐쇄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자치권 부정에 분노한 주민들은 민병대를 구성했고, 영국 관리들을 내쫓았으며, 행정기관을 모두 폐쇄해 버렸습니다. 다른 식민지의 사람들도 주민들의 저항에 공감했으며, 혁명의 기운이 점차 감돌았습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
1774년 9월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6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대륙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강압적인 법에 대해 국왕을 탄원했고 영국과의 통상을 단절하게 됩니다. 이어 1775년 보스턴 서쪽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서 처음으로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대륙회의가 다시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인해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게 됩니다.
발표된 독립선언서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는 조물주가 주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정부는 이 권리를 위해 조직되었으며, 정부의 권력은 민징의 동의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해치는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는것은 민중의 권리이다. 독립 선언서에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전쟁은 어느 쪽이 승리할지 예측이 어려웠습니다. 영국은은 강하고, 잘 조직되어 있으나, 대서양을 건너 낯선 땅에서 싸워야 했고, 식민지 민병대는 익숙한 자기 땅에서 싸웠으나, 식민지간의 통일성이 부족해 효율적인 명령체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777년 10월 영국이 새러토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참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본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했으며, 미국의 동맹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군사 원조를 확대했습니다. 이어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며 프랑스의 동맹 자격으로 영국에 맞서 참전하게 됩니다. 1782년 영국은 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햇습니다. 1783년 파리 조약을 채결하며,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전쟁이 종결됩니다.
아메리카 13개주는 1787년 필라델피아에 저헌의회가 소집되어 강한 권력을 갖는 연방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로써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미합중국의 탄생은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자극했으며,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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