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서울 성남중과 성남고의 설립자인 김석원 동상이 학교에서 철거되었습니다. 이유는 설립자 김석원이 일본군 대령출신의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는 등 뼈속까지 친일파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학교에 세워져있던 몇몇 친일파 동상은 철거되었지만, 아직까지 수십개의 친일파 동상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으로 아직 학교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대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언론과 교육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으며 1962년 지금의 대통령장인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촌 김성수는 1932년 보성 전문학교를 인수해 해방 후 고려대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했으며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독립군에게 지원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우원회에 의해 그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던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가 민족언론으로 창간한 동아일보에는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는 글이 올라왔으며, 그는 총독부가 조직한 친일단체인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의 이사로도 활동 했습니다. 결국 그의 서훈은 박탈되었고, 성북구의 인천로는 지명 변경을 검토해 고려대로로 변경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대에는 인촌기념관과 그의 동상이 남아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고려대 학생들은 인촌기념관의 명칭변경과 동상철거를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화여대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1930년대 미국으로 유학해 조선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딴 엘리트 우월 김활란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맡은 인물입니다. 여성 꼐몽과 농촌계몽을 위해 힘쓰고 개신교로써 종교활동도 열심히 했던 그였지만, 1936년 12월에 친일단체의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상무이사를 맡으며 친일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김활란은 부녀자들로부터 금비녀와 금반지 등을 받아 국방헌금 명목으로 일제에 전달했고, 이화여대의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이화여대 자체가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 학교인것과 김활란 본인이 개신교도인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강요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징용, 징병, 학병을 독려했습니다. 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은 동상 철거를 주장하며, 수차례 시위를 벌였지만, 동상은 아직까지도 학교에 남아있습니다.
상명대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여성 교육에 힘써 그에 대한 훈장을 두차례나 받은 계당 배상명은 일제강점기 당시 훌일 상명대학교가 되는 상명고등기예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그의 친일행적이 시작됩니다. 1941년 9월부터 전위여성격려대에 가담해 한반도 북부를 순회하며 여성들의 전쟁 지원을 촉구하는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43년에는 징병제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거나, 찬양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상명대학교는 서울과 천안 캠퍼스 모두에 배상명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상명중과 상명고에도 역시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연세대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용재 백낙준은 일제강점기 부터 교육자로 활동해 해방 후에는 문교부 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다가, 46년 대학교로 승격되며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자로 알려진 모습과 다르게 백낙준 역시 태평양 전쟁때 부터 친일행적을 보입니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홍보하엿고, 학병과 징병을 선동하며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한술 더 떠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하기 위한 모금 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애국기헌납기성회의 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앞서 김활란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종교가 개신교이고, 학교도 개신교학교인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산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는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85년 향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습니다. 아직도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백낙준 동상이 남아있습니다.
추계예술대학교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추계황신덕은 추계예술대학교와 서울 중앙여자고등학교 등을 운영중인 추계학원의 설립자 입니다. 여성 인권운동가이자 교육자로 알려져있는 그는 실체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41년부터 일제에 협력했으며, 매일신보에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43년에는 근로정신대 지원을 강요하는 강연을 했고 제자들을 여자근로정신도로 차출해 일본 군수공장으로 보냈습니다.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의 흉상은 철거된 적이 있었지만 추계학원은 2000년 신축 대학원 건물에 다시 세웠습니다. 재학생들과 교사들이 반대운동을 했지만 묵살되었습니다. 추계학원 측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딴 황신덕기념관과 추계 콘서트홀을 운영중입니다.
서울대에 남아있는 친일파 동상
서울대학교에도 친일파의 흔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국으로 유학해 음악을 공부한 현석 현제명은, 국내 서양음악의선구자 중 한명입니다. 하지만 그도 일제강점기 막바지부터 친일활동에 열을 올립니다. 1927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주도해 만든 조선문예회 라는 친일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더니, 이후 총독부가 만든 여러 음악 단체에서 활동하며 친일 음악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일제를 찬양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음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별다른 일 없이 교향악단을 조직해 운영했으며, 그가 만든 경성음악학교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을 편입되며 1952년에는 예술대학의 학장이 되기도 합니다. 황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던 그의동사은 서울대 음대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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