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에 대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권총 4발을 쏘게됩니다. 그리고 이토가 아닐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추가로 총을 쐇습니다. 처음 발사된 4발중 3발이 이토에게 적중하게되고, 곧 이토는 열차로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게 됩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에의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거사 이듬해 1910년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결국 순국하게됩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의 나이 32살이었습니다. 약 5개월 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가족들은 남겨졋습니다. 서슬퍼런 일제 식민지 시대, 그의 가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남은 가족
안중근의사의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게됩니다. 연해주에 거쳐를 마련했고, 급히 그곳으로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연해주로 가는 길 식구들은 중국 어느 정거장에 닿았습니다. 맞은편에 기차 한대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후에 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이 실린 기차였고, 그때까지도 가족들은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야반도주 하듯 머나먼 연해주 땅에 도착한 가족들은 늘 불안함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1911년 여럼 7살의 맏아들 안분도는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일제가 저지른 짓이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7~8년을 떠돌다 안중근의사의 가족들은 중국 상해로 이주하게됩니다. 상해에 출범한 임시정부가 가족들을 부른것이었습니다. 상해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안중근의사의 유족을 아끼고 보호해 줬다고 합니다. 이때 안준생은 가톨릭스쿨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안의사의 의거 이후 가족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평안한 날들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없는 상해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의 남은 가족들
그러던 어느날 임시정부가 사라졌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 직후 일본은 배후에 있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찾아내기 위해 상해를 샅샅이 뒤졌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유족은 그렇게 상해에 버려지게 됩니다. 일본은 사라진 임시정부 대신 안중근의 유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일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속에 지옥과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안준생은 서른살이 될때까지도 제대로된 밥벌이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은 안중생이 직장을 얻으면 나중에 들이닥쳐 훼방을 놓았다고 합니다.
유족들은 그렇게 상해에서 끝도 없는 터널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갓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안준생의 앞에 일본 고위층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들 중 나나가 자기를 미나미 총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안중생에게 곧 서울 박문사라는 절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행사에 참여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과하라고 제안하게 됩니다. 사실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었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안준생은 죽게 될게 뻔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나온 일을 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말이 이어졌습니다.
안준생이 변절 과정
안준생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졋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절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안을 거절하고 이렇게 죽는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안준생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때 안준생은 고작 3살이었습니다. 대신 낯선 이국땅에서 어머니, 할머니, 누나와 함께 집없이 떠돌아다닌 기억, 임시정부가 떠나버린 상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끼니를 때웠던 기억,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 없이 비참한 나날을 보낸 기억들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냥 잠깐 어느 한순간이라도 편하게 산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준생은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다.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 얼마전 부터 떠돌던 믿기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 마당엔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미나미 총독은 안중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안준생 앞에 선 이토 히로쿠니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안준생이 허리를 숙이며 두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고,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나왔습니다. 다음날 일본 신문은 테러리스트 안중근 의사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는 내용으로 가득채워졌습니다. 그날 이후 안중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고,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일본 곳곳을 돌며, 눈물의 화홰를 재현했습니다.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은 안준생에 대해 호부견자라말하며, 침을 뱉었다. 소식을 들은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여 응징해야할 대상으로 안중생을 꼽았습니다. 막대한 상금을 받고 안준생은 다시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김아려는 돌아온 안준생을 껴앉으며 고생했다고 위로했습니다. 안준생은 2살 많은 정옥녀와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그리고 어머니 김아려의 조언에 따라 약국을 차렸다. 그렇게 안준생은 많은 돈을 벌고 풍족하게 살며, 인생에서 더없이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아내 정옥녀와 자식들을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국내로 혼자 귀국합니다. 귀국한 안준생은 부산에서 폐결핵을 앓다 1951년 귀국한 그해 쓸쓸하게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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