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제가 없던 시절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오늘은 현대적 외과수술이 시행되기 이전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고전적 수술에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원전 이전의 수술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질병의 존재를 인식햇으며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치료의 대부분은 신에게 올리는 기도나 주술적인 방법인 주문, 귀신을 쫒는 부적, 별자리를 잊는 점성술, 동물의 시체해부등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물론 수술적인 방법이 없던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사시대 두개골에서 뇌 수술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치료를 위한 수술인지, 주술의 일부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기원전 1700년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함무라비 법전에는 무려 백내장 수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법전에 의하면 수술은 청동칼로 진행 되었으며, 귀족의 수술에 성공시킬경우 은 10개를 노예를 치료했을경우 은 2개 평민을 치료했을때는 은 5개를 받았습니다. 수술비는 꾀 비싼값이였고, 의사들은 수술을 매번 성공한다면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큰 리스크가 있습니다.
법전에서는 의사가 수술을통해 환자가 죽거나 두 눈을 멀게하면 양손을 잘랐습니다. 어떻게보면 의료과실에 대한 배상책임정도로 볼 수 있지만, 그시절 수술 성공률과 수술했을때 성공했을때 생존률을 보면 수술을 하는것은 오히려 손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수술 문화
고대 이집트 벽화에는 각종 수술도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인들도 기구를 이용한 외과수술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기원전 1700년대에 기록된 파피루스에는 창상과 골절 치료가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1500년대에 기록된 파피루스에는 포경수술, 백내장, 혈관수술에 대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수술의 고통을 없에기 위해 아편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포경수술하는 아이에게 목을 졸라 반쯤 질식시켜 수술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가 만드라고라 뿌리를 이용한 마취를 시도한 기록이 있습니다. 만드라고 뿌리가 환각 작용을한다는것을 이용해 뿌리를 이용해 만든 와인을 환자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이밖의 서양문명의 고대 의사들은 환자 머리에 나무통을 씌우고 두들기는등 뇌진탕을 유발시키거나 가시로 다른 부위를 찔러 수술부위 통증을 잊게 만들기기도 했고 환자를 질식상태로 만들어 정신을 잃게하는등 수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중국의 수술 문화
고대 중국은 외가적 수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침과 약이 치료의 전부였습니다. 의사의 대우도 좋지않아 한나라 때의 의사는 각지를 떠돌며 업을 유지했으며 진료를 기피하면 관에 고발당하기 일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한 말에 등장한 화타는 중국의학사 남을 혁명적인 인물입니다. 화타는 침과 약이 다스리는 중국의학세계에서 수술 도구들을 들고 외과적인 수술을 행해졌습니다.
물론 그도 침과 약으로 치료할수 없는경우에만 수술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화타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만들어 환자를 마취시킨 후 개복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여 그의 외가 수술방식은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물론 화타의 의술이 사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세 유럽의 의술
중세 유럽의 의술은 로마시대 대표 의사인 갈레노스 이후로 큰 발전이 없었습니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그리스의 의술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0세기 말에 태어난 페르시아 제국의 이븐 시나는 그리스 이슬람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전범이라는 책을 완성시켰습니다. 당시 알려진 모든 의학정보를 담았다고 여겨지는 이 책은 후에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의학의 기본서가 됩니다. 중세 말에는 유럽에도 의과 대학이 설립되며 고대 그리스와 발전한 이슬람의학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해부학을 중심으로 실험생리학, 임상의학 등이 발전 했습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수술실에서는 비명소리가 난무했습니다. 19세기 중순까지 외과적 수술은 환자와 의사에게 고역이였습니다.
18세기 19세기 초 외과 수술
수술은 보통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거나, 방광결석을 제거하는 수술이 주요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했냐면 의사로부터 수술 소식을 들은 환자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으며, 수술을 앞두고 수술실을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든 수술을 하더라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쇼크사 하는 일도 많았고 수술을 무사히 끝마치더라도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19세기 프랑스 외과 의사였던 알프레드 벨프는 수술시의 고통이나 위험성에 관해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것은 의사의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어찌됬건 그 시대에 수술을 받아야하는 상태라면 거의 죽는것이라고 봐야하니 생존률이 어떻든 환자를 위해 수술을 하는것이 옳았다고들 합니다.
마취없는 수술은 의사 이외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수술하기전 의사는 먼저 환자를 움직일수 없도록 의자에 꽁꽁 묶은뒤 힘쌘 조수들이 움직이 못하게 잡고있었다고 합니다.
고통에 몸부림 칠 경우 수술이 매우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환자를 고정하는것은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묶고 눌러도 완전히 고정시키기는 불가능 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수술을 끝내는것이 좋았습니다. 조수가 없다면 의사는 수술을 진행하기 많이 힘들었습니다.
마취제가 없던 시대에 진정 유능한 의사는 수술시간이 짧은 의사였습니다. 수술 시간이 짧을수록 의사들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1824년 영국인 의사 에스틸린 쿠퍼는 하지 절단 수술을 하는데 20분이 걸렷지만 10년후 제임스 심은 동일한 수술을 90초만에 끝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의사인 로버트 리스턴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수술용 칼을 입에물고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사망률이 가장 높은 수술
수술을 빠르게 해야 했던 만큼 수술중 실수도 종종 일어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시인 로버트 리스턴의 유명한 일화는 사망률 300% 사건 입니다. 웨스트 엔드의 가장 빠른 칼이라고 불렷던 리스턴은 수술을 구경하러온 구경꾼들에게 시간을 제라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수술을 시장했고 하지막 칼질이 너무 빨랏던 나머지 환자의 몸을 붙잡고있던 조수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손가락이 잘린 조수가 비명을 질럿지만 수술을 빨리 끝내기위해 수술을 강행합니다. 톱을 쓰는 순간 구경꾼의 옷이 톱에 걸렷고 톱에 걸린 구경꾼의 옷이 잘려나갔습니다. 구경꾼은 상처 하나 없엇지만 피와 비명으로 가득찬 방에서 옷자락이 톱에 잘려나가지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환자와 조수도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한 수술에서 3명이 죽은 이 사건은 역사상 가장 사망률이 높은 수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절단수술은 받는 환자의 4분의1이 사망하는 높은 사망률의 수술이었지만 리스턴의 환자는 10분의1이 사망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이후 마취제가 등장하면서 수술성공률은 더욱더 올라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19세기 중반 의사들은 웃음가스로 불리는 아산화 질소를 이용한 마취를 시작해, 에테르를 이용한 마취 방법을 발견하며, 현대적 마취 방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부작용이 적은 클로로포름을 이용해 마취를 했으며, 마취는 부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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