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표동물 호랑이
우리나라의 대표 동물으로는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보통 호랑이를 많이 떠올릴 것입니다. 호랑이가 우리 민족의 용맹스러운 기백을 상징하고 한반도 모양이 호랑이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개올림픽 모두 마스코트가 호랑이었습니다.
대표 동물 호랑이의 이야기를 할때 우리나라의 국토가 호랑이처럼 생겻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억지다, 토끼처럼 생긴것이 맞다, 우린 용맹한 호랑이가 맞다 토끼는 일제가 우리를 약하게 보이게 하기위 해붙인것이다. 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은 국토를 어떻게 인식햇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호랑이 형상
조선시대 한반도 형상에대한 인식은 실학자 이중환이 쓴 지리책 택리지에 처음 기록되어 있습니다. 1751년 저술된 이 책은 우리땅을 중국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읍하고 있는 노인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지금의 한반도를 보면 도저히 사람의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1402년 혼일강리 역대국도지도에서 한반도를 보면 어느정도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책이 쓰일 당시 지금처럼 정확한 지도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연관 지어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택리지의 국토 형상에 대한 인식은 대중화 되지 못했습니다.
최남선이 그린 한반도 모양
한반도 형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된것은 한일 강제병합시기 입니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도쿄 제국 대학의 고토 분지로를 조선에 보내 연구하게 합니다. 고토 분지로는 조선 산악론을 비롯해 지도인 조선전도 등 여러 연구자료를 남깁니다.
1903년 그는 한반도의 지질 구조도를 발표하며, 한반도의 형상이 일어서 있는 토끼가 중국 대륙을 향해 뛰어가려는 형상같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이론은 지리 교과서에 실려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됩니다. 당시 식민 지배 정당화를 위해 가능한 조선의 역사를 초라하게 다시 그려야 했던 일본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국어시간에 더 친숙한 이름이자, 대표적인 친일 변절자인 최남선은 한반도를 토끼모양으로 형상화 한것에 대해 반발했습니다.
그는 소년지를 창간하며, 한반도를 맹호가 발을 들고 대륙을 행해 달려드는 생동감 있는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이런 최남선의 한반도 지도는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붉은 저고리, 신문계 등 각종 잡지들의 표지에도 이 호랑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일제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호랑이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도에 대한 논쟁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에 대한 역사를 보면, 대표 동물이 호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조선과 호랑이
평야가 많은 중국이나, 섬나라인 일본과는 달리 국토의 3/4이 산지인 만큼 호랑이가 살기 좋고 호랑이와 가깝게 산 민족은 없었습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호환이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를 뜻합니다. 마마는 천연두입니다. 얼마나 호랑이가 많았는지 호환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조선 이전 고려시대때 원나라에서 호랑이 사냥꾼을 보내 잡아갈 정도였습니다. 호랑이와 살아온것이 조선시대 이전부터였던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록마다 호랑이에게 수명에서 수십명씩 계속해서 물려 죽고 나중에는 왕궁인 창경궁에 까지도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와 가까이 살다보니 호랑이 관련 민간 설화도 많았습니다.
호환을 물리치거나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 은혜를 갑는 호랑이, 우스운 호랑이 등 호랑이의 성격도 가지각색으로 묘사 되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들을 모두 합치면 호랑이를 주제로 두꺼운 책 한권이 나올것 같습니다.
착호군의 등장과 착호군의 역사
하지만 조상님들도 호랑이에게 당하고만 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1416년 나라에서 호랑이를 잡는 부대인 착호갑사를 임시 조직으로 편상하게 됩니다. 이들은 사냥 실력을 인정 받으며 정식 부대가 되었고 1421년 40명이던 것이 성종 때가 되면 440명으로 인원이 늘어납니다.
위험한 임무엿기 때문에 아무나 지원하지 못햇습니다. 180보 밖에서 목궁을 명중시켜야 했으며, 두손에 각각 50근씩 들고 100보이상을 한번에 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민간에서도 호랑이 사냥꾼들이 활약했습니다. 초기에 함정을 파고 덫을 놓으며 활과 창으로 사냥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이들의 무기는 화승총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다만 총의 사정거리가 54m밖에 안되었고, 연발도 되지 않아 여러명이 뭉쳐 다녀야 했습니다.
위험했지만, 그래도 돈벌이가 좋았습니다. 당시 호랑이 가죽은 비싼 사치품으로 대짜 호랑이 가죽 한장이 보통 100냥정도 되었습니다. 이는 서울 초가집 한채와 맞먹는액수였습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쓰이던 방식의 총을 20세기 초까지 사용했는데, 당시 조선에 들어온 러시아 사냥꾼은 16세기 구식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잡는것에대해 매우 놀랬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화승총의 유효사거리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호랑이가 약 18m앞에 접근할 때까지 매복하고 있다가, 한번에 호랑이를 잡아냈다고 합니다. 이후 호랑이 사냥꾼들은 항일 의병에도 참가해 의병들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치는 등의 활약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제는 사냥꾼과 의병의 씨를 말리기 위해 총포급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어 그들의 총탄을 빼았았습니다.
일제와 호랑이 사냥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호랑이 사냥꾼들에게 잠시 총을 쥐어줍니다. 이유는 총독부가 실시한 해수구제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군인을 호랑이 사냥에 동원했으며, 조선인 사냥꾼도 투입했습니다. 일본인들도 조선으로 원정 사냥을 와 사냥을 즐겼습니다. 많은 호랑이 가죽이 일본으로 건너갓고, 도쿄에서는 호랑이 고기 시식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씨가 말라가기 시작합니다.
해수구제사업 중에는 호랑이 뿐만아니라 표범 늑대. 곰 까지 모두 절멸에 가깝게 잡아갔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 꿩이나 기러기 오리, 두루미, 황새 같은 철새까지 잡아 그 수가 격감했습니다. 일본이 이미 1873년에 조수수렵규제가 제정되고 1895년부터 192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수렵법이 제정되는 것을 보면, 이는 절대 조선의 생태환경을 생각한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해수구제사업에 대해서는 논쟁할 부분이 많지만, 남김없이 잡은 부분과 사업과 상관없는 동물까지도 규제없이 잡은 부분은 분명 규탄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한반도에서 더이상 호랑이를 볼 수 없지만, 국내 동물 보호 단체에서 한국 호랑이와 동일한 혈통인 연해주의 아무르 호랑이를 보존하고 한반도에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인구밀도가 높은 남한지역에는 복원이 불가능하고 백두산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