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제도의 도입
의녀 제도는 태종 6년 부녀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맨 처음 도입되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병이 있어도 남녀 구별이 엄격한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남성 의원에게 몸을 보이기 꺼려했고, 이로 인해 치료 자체를 받지 못해 심지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상소가 올라오기에 이르자 태종은 마침내 여자아이 10명을 뽑아 의술을 가르치게 했고, 이로써 우리 역사 최초의 여성 의원인 의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녀는 3년에 한번씩 150명을 뽑았다. 그리고 이들 중 실력이 뛰어난 인재는 조선시대 관청인 내의원에 배치되었는데, 특히 이 가운데에서도 특출난 의녀는 이례적으로 임금을 보살피는 어의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제 조선을 대표하는 의녀중 하나인 대장금은 중종이 임종 직전까지 몸을 맡겻을 정도로 신뢰받았던 인물로 무려 20년 동아니이나 어의녀로 지내며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의녀의 다양한 역할
한편 조선시대 의녀는 본래 취지인 의원으로서 역할 외에 다양한 임무를 맡기도했는데, 그중 하나로 오늘날의 수사관 비슷한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한 예로 당시 조선에서는 과한 혼수를 국가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종종 왕실 척족간 주고받은 과도한 예물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만약 이러한 사건이 보고되면, 이때 여성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남성대신 의녀가 여성의 방을 조사하는 수사관 역활을 담당햇습니다.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의녀는 여성 범죄자의 몸수색을 전담했고, 나아가 죄를 저지른 궁녀외에 후궁이나 어린 왕자를 잡아들이는 임무를 맡았는데, 실제로 9살에 자신의 이복형인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 역시 당시 의녀의 손에 이끌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짚어볼 한 가지 아이러니한 시실은 이처럼 의녀라는 집단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꽤나 전문적인 분야의 일을 수행했던것과 달리, 이들 대부분의 인생은 원만한 가정생활조차 힘들만큼 불행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날때부터 이들에게 주어진 천민이라는 거역할수 없는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의녀가 인기가 많앗던 이유
의녀는 천민 신분으로 대개는 관비 출신이었습니다. 또 궁에 상주하는 궁녀들과 달리 출퇴근을 했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것처럼 결혼이 가능했다. 그래서 의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양반의 첩으로 들어갈려고 애를 썻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비록 서출이지만 앞으로 태어날 의녀의 자식들 또한 양인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의녀 중에는 양반의 첩이 되는걸 인생 최고의 행운으로 여기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양반 입장에서도 의녀는 기생처럼 노골적으로 돈 때문에 웃음을 팔지 않을 뿐더러, 어쨋든 마음만 잘 맞으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존재라고 취급했기에 당시 양반들 사이에서 의녀의 인기가 기생 이상으로 높았던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한 예로 조선시대 일반 서민의 치료를 담당한 혜민서의 관원들은 혜민서 소속 의녀들과 은밀히 정을 나누는것을 별로 어렵지 않은 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의녀 백이
참고로 이러한 현상은 연산군이 혜민서 의녀들을 동원해 술을 따르고 음악 연주를 시키는 등 말 그대로 기생 취급한 일을 계기로 더욱 심해졋는데 그래서 이때쯤부터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조선 사람들은 의녀를 가르켜 흔히 약방 기생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의녀를 향한 당시 조선 사회의 따갑고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의녀중에는 그 빼어난 미모로 인해 신분을 뛰어넘어 심지어 왕족과 연애를 한 이들도 있었다고합니다. 대표적으로 의녀 백이는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과 연애를 했는데, 그러나 평원 대군이 결국 19 나이로 죽자 그 뒤에는 이사평과 눈이 맞아 이사평의 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참고로 이사평은 대마도 정벌을 이끌었던 이종무의 셋째 아들로 이종무는 왕실의 외척이기도 햇습니다. 한편 이사평이 백이를 첩으로 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은 몹시 분노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왕자와 염문이 있던 의녀를 왕실 외척의 자식이 첩으로 들였다는 사실이 세종으로서는 상당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세종은 이 사태에 대해 인척간 한 여자를 가까이한것이 법도에 어긋난다는 명목으로 당시 정3품에 해당하는 이사평을 그 관직에서 파직시켜 버렸고, 백이 또한 이사평의 집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어 다시 의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심지어 간통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되면서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의녀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됩니다.
참고자료 - 유튜브 잡학노트 조선시대 양반들은 기생보다 의녀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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