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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에 대한 미군의 반격 둘리틀 공습

by 331675 2021. 4. 14.

둘리틀 공습이 일어난 이유

진주만 공습은 해전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기습중 하나입니다. 일본 함대는 5600KM에 달하는 북태평양 항로를 들키지 않고 항해 했고, 비행사들은 맹 훈련을 통해 지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전에서 뛰어난 명중률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공격 개시 90분만에 미국은 전함 5척이 격침되고 200여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2000명 이상이 사망하게 됩니다.

둘리틀 공습 준비 과정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빠르게 무너졌고, 특히 공습의 충격으로 인해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미군으로써는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반격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기를 높이는 방책으로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포격할 계획을 새우게 됩니다. 그런데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폭격기의 행동반경 내에 ㅇ일본을 포함한 기지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소련의 영토에서 폭격기를 출격시키면 일본 본토로의 타격이 가능했지만, 당시 일본과 소련의 중립 조약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사항 이었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에 탑재된 함재기를 이용한 포격의 경우에는 항공모함을 일본 본토에 아주 가깝게 접근을 시켜야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미 진주만 공습으로 상당한 해군력을 잃은 미국에게 항공모함을 일본 본토 가까이 노출시키는 작전은 리스크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다 일각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육군의 폭격기를 발진시켜 일본을 타격하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육군의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어 멀리서 발진이 가능했고,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록한 함대는 살릴 수 있을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육군의 폭격기는 활주거리가 길고, 심지어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항공모함으로 돌아오는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결국 최종 작전은 ㅇ육군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공습한 뒤 조정사들은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하는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귀한 지역은 중국으로 선정 되었고, 사전에 중화민국 정부와 협상하여 귀환 루트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미군은 작전을 위해 급히 육군 B 25폭격기를 항공 모함의 짧은 ㅂ비행 갑판으로부터 발진할 수 있도록 경량화 했고, 육군 조종사들은 항공모함 갑판과 같은 길이의 활주로에서 이함을 맹 연습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둘리틀 공습 시작

드디어 1942년 4월1일 미군은 16기의 B 25 미첼을 탑제한 항공모함 및 군함들을 이끌고, 센프란시스코를 출발합니다. 그러나 4월 18일 오전 7시 38분 미 함대는 일본 경비정에 의해 발견되고 결국 오전 8시 20분 B 25편대는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310KM 더 먼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하게 됩니다. 한편 일본 해군은 경비정으로 부터 받은 무전을 통해 미 항공모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위한 준비를 개시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것이라 판단한 탓에 항공모함이 좀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야 공습이 이루어질것이라 판단하게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판단보다 20시간이나 빨리 B 25편대가 일본 상공에 나타나게 됩니다.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탓에 대 낮에 폭격이 일어났고 둘리틀 중령이 인솔한 B 25편대는 도쿄,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등을 폭격하게 됩니다. 그 결과 50여명의 사망자, 가옥 262체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습니다.

둘리틀 공습 그 이후

둘리틀 공습 이전까지 외세에 의해 단 한번도 타격을 받은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국민과 일본군 수내부의 충격은 진주만 공습못지않게 컷습니다. 한편 작전에 참가한 B 25 16대는 모두 손실 되었으나, 특공대원 80명 중 69명이 생환했고, 둘리툴 중령은 작전의 성과로 인해 대령을 건너뛰고 바로 준장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둘리틀 공습의 성공은 태평양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는 동시에 그해 6월 미 일 양국의 운명을 바꾼 미드웨이 해전의 실행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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