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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by 331675 2021. 4. 7.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일대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1908년 12월 푸이는 고작 3살때 청나라 황제에 오르게됩니다.  즉위식은 베이징 자금성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즉위식에서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대신들제은 불길한 징조라며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3년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홤민국을 세운 신해 혁명이 발발합니다.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에의해 6살의 푸이는 황제 자리에서 퇴위되는데 위안스카이는  민심의 혼란을 우려한것인지 푸이로 하여금 자금성에 남아 황제로서의 대우를 받도록 조치해 줍니다.

그래서 푸이는 자신이 퇴위된 사실도 모른채 자금성 안에서의 황제로서 지내게 됩니다.

일본과 푸이

그러다 1924년 새로운 군벌에 의해 베이징이 장악되고, 푸이와 황족에게 자금성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푸이와 그 일가는 아버지 순친황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푸이는 아버지 집에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해 12월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쳐 갑니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활용하여 이듬해, 푸이를 텐진으로 데리고가 어느정도 토지를 내어주고 살도록 합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하게되고 일본은 결국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재위시킵니다. 사실상 실권이 없는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리로 푸이는 11년동안 만주국 황제로 재위합니다. 참고로 청나라 황제 제위는 총 3년이었습니다.

소련의 지배와 푸이

1945년 8월 세계 2차대전 일본의 무조건 항복후 만주에 소련군이 밀려오고 푸이는 소련군의 포로가됩니다.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당시 푸이는 공포에 떨었지만 소련은 타국의 군주포로에 대해 특별대우를 해 줫는대 그를 위해 작은 파티를 열어주고 매일 4끼를 먹여줫다 음식뿐만아니라 거처에 있어서도 푸이는 라디오가 있는 독방을 받았고, 소련 측은 그가 피아노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피아노도 거처에 가져다 줍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노동을 할 때 그는 산보를 하거나 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소련군의 호의에 대해 푸이는 몹시 고마워했고,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 되는것을 걱정해서 소련군 관계자에게 자기 소지품을 갖고 있던 금품이나 시계등을 뇌물로 주고 중국 송환을 막아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공과 푸이

그러던 중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한 직 후 1950년 10월 푸이는 중국으로 이송되어 만주 푸순 감옥에 수감됩니다. 처음 중국에 송환 되었을 때 푸이와 그 일행은 모든것을 채념하고 바로 처형 당할것을 예상했지만, 중공 정부는 푸이와 그의 일행을 교화시켜 선전용을 삼으려 했습니다.

 

푸순 감옥생활 9년은 푸이에게 인간 개조의 시기였습니다. 공산당의 사상 교육을 받고 저우언라이 수상의 권고로 자서전 '나의 반생'을 쓰게됩니다. 이 책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마오쩌둥과 중국 인민을 숭배하고 형무소 생활을 미화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황제 시절에 맹목적으로 가졌던 일본에 대한 호감을 냉정한 자세로 비판했습니다.

 

1959년 12월, 푸이는 모범수로 사면됩니다. 석방된 이듬해 1960년 푸이는 마침내 자신의 일을 인생 최초로 부여받습니다. 중국 과학원 식물연구소에 부속된 식물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조수가 됩니다. 식물원에서 그에게 배당된 일은 장미 재배였고, 그는 손재주가 없었다고 합니다. 

 

1962년 푸이는 다섯번째 결혼을 합니다.리수셴이라는 40대 간호사 였는데 그녀는 황족이나 귀족도 아닌 일반 백성이었고, 악처였다고 합니다. 평민이 된 푸이에게 걸맞는 부인이었다고 하는 평가가 많습니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붉은 바람이 불 무렵 푸이는 암에걸립니다. 

홍위병들은 청조 마지막 황제인 그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홍위병들의 공격을 염려해 다수의 병원이 그의 입원을 거부하여 제대로된 진료도 받지 못햇다고 합니다. 결국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베이징에서 푸이는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인생은 거의 감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살에 황실로 들어가 자금성에 갇혀 살다, 일본 영사관으로 도피했고, 만주에 가서도 일본 관동군에 포위되었으며, 그 후 러시아와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살아남는법을 터득하고, 일본에게는 천황을 찬양하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를 미화 하고, 중공에서는 마오쩌둥을 숭배했습니다.

 

푸이의 시종 노릇을 하다가 등을 돌린 한 사람은 "푸이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남는 명인이고, 발년에 몇 년간 보인 표면적인 겸손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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