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꼭 뚫고 싶엇던게 두가지 있었습니다. 구대륙의 수에즈 지협과 신대륙의 파나마 지협이였습니다. 두 지역의 공통점은 바로 대양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엿습니다.수에즈 지협은 대서양과 인도양을 가로막고있고, 파나마 지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다 가마가 희망봉 루트를 개척한 이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게됩니다. 당연하게도 두 나라는 세계 곳곳의 바다에서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파나마 운하 시작 역사
이에 따라 교황에게 중재를 부탁하게됩니다. 이에 아메리카는 에스파냐가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이 진출하여 서로의 충돌을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와 그 너머의 아시아에서는 향룔를 비롯해 온갖 귀중한 무역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반면, 신대륙이였던 아메리카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새로 발견한것이라고는 담배, 매독, 과같은 것들이엿고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구대륙에대한 질병에 면역이 없어 전염병에 취약해서 노예로도 쓸 수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향로무역이 부러웟던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 서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포르투칼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카를5세의 명으로 마젤란이 이끄는 함대가 세계 일주를 목표로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이정도 되는 위도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끝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존재할거라고 생각한 아메리카대륙의 끝은 예상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습니다. 유빙이 떠다니는 남극권이였으며, 폭풍이 시도 때도 없이부는 아주 위허한 바다였던것 입니다. 그러나, 마젤란과 탐험대는 배 두척을 잃으면서 까지 지옥의 해협을 통과했고, 태평양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훨씬 넓은 지구 최대의 바다였고, 처음 접해보는 바다에서 그들은 중간 기착지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횡단해 버렸습니다. 끝내 필리핀에 상륙하면서 서쪽으로만 항해하여 아시아에 가는것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필리핀 현지 주민들과의 충돌로 전투가 발생하고 지휘관이엿던 마젤란을 비롯해 많은 선원들을 잃고 배도 잃은채 남은 배 1채로 서쪽 포르투갈 영역을 통과해서 3년만에 겨우 에스파냐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세계일주이자 지구가 둥글다는것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만 이를통해 에스파냐의 결론은 필리판 마닐라와 태평양연안에 아카풀코라는 항구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아카풀코와 대서양 연안의 베라크루스를 육로로 연결하여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파나마 지역에 운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파나마 운하 건설의 문제
이 파나마 지협의 땅 82km만 뚫으면 남극해의 지옥의바다도, 아카풀코와 베라 크루스와 베라크루스사이의 정글지대도 지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파나마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파나마 지협은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로 말 그대로 바다에 잠긴 산맥이며, 이 곳에 운하를 건설한다는것은 곳 산을 뚫어야 한다는 이야이였습니다.
그렇게 꿈과 같은 이야기 같은 파나마 운하는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고 있던 19세기에 서서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869년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개통시키는대 성공하였고, 이집트에서 허가를 받아 수에즈 운하를 건설햇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1880년 그 경험을 살려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도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에즈 지협의 지역 특성에 비해 파나마 지협의 지형은 운하를 건설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파나마 지협은 이전에 말했듯이 산과 정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사막이였던 수에즈 지협과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운하 건설이였습니다. 인류의 주적 모기의 활약으로 노동자들은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걸려 죽어나가고 결국 레셉스와 프랑스는 9년간 21900명의 사망자를 기록하며 파나마 운하 사업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결국 이로인해 책임자엿던 래샙스는 빚덤이에 앉아 참담한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훨씬 길이가 긴 수에즈 운하를 완성햇던 프랑스마저 포기햇던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도전하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도전하게 됩니다.
미국과 파나마 운하
미국은 애초에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의 영국 식민지들로 부터 시작된 나라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동부해안과 대서양쪽에 국한될 수 밖에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구입후 멕시코에게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점령하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레스카까지 구입하면서 북미 대륙에서 미국을 막을 장애물들은 모두 사라졋고, 서부에서 광대한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서부의 개척이 가속화됩니다. 그로인해 19세기 말 로스앤젤러스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표적인 서부 대도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단기간에 급성장으로 태평양에 진출한 미국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미 이빨빠진 사자인 에스파냐를 공격해서 괌과 필리핀을 통째로 점령하게 됩니다. 그렇게 파나마에 도저히 운하를 뚫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서부의 개척이 완료된 미국은 양대양에 접한 해양대국으로서 이제는 태평양이든 대서양이든 언제나 해군력을 투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젤란처럼 적도를 넘어 남극해의 죽음의 바다를 돌아가야만 했던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수에즈 운하의 무역과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군함을 육로로 수송할 수는 없었습니다.
파나마 운하 영토 전쟁
190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프랑스에 4000만달러를 지불하여 파나마 운하 사업권을 매입했습니다. 그 후 파나마 땅의 주인이던 콜롬비아에게 억지 조약을 강요해여 운하 통로를 중심해서 16킬로미터 양옆의 땅을 미국이 99년간 임대하는 조건으로 일시불로 1000만달러 운하 완공 이후 1년에 25만달러씩을 임대료로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조약을 채결합니다.
콜롬비아 의회에서는 반대를 했지만, 사실상 파나마를 돈주고 자기네 식민지를 만들겠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북아메리카를 평정하고 일찍의 본색을 들어내고 있던 미국에게 콜롬비아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이미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열강이였으며, 무엇보다도 서유럽 국가들보다 더 교묘했습니다.
미국은 콜롬비아 내의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을 이용하여 식민지인듯 식민지 아닌 식민지 같은 독립국을 만들어 버릴 생각을 합니다. 1903년 11월2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나마 독립세력이 봉기를 일으켯고, 바로 다음날인 11월 3일 파나마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 했습니다.
그리고 미 해군은 파나마 해군은 파나마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콜롬비아군은 독립을 막으려 왔다가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3일뒤인 11월 6일 미국은 신생 파나마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겨우 5일만에 나라를 하나 만들어 버린것입니다. 미국은 자신이 새운 파나마 정부와 운하 주변 16킬로 땅을 무기한 임대하기로 조약을 만들엇고 바로 다음해인 1904년 파나마 운하 공사가 시작됩니다.
파나마 운하 건설
미국은 첫 1년간 프랑스가 하던 공사를 그대로 이어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왜 9년간 21600명의 사망자를 기록하고도 포기하였는지 깨닳게 됩니다. 파나마 지협은 산맥 그 자체였습니다. 태평양 연안의 화강암 지반을 도저히 뚫을수 없는것 이었습니다. 그 지역을 뚫을만 하면 말라리아로 인한 인명피해는 늘어나고, 어느정도 뚫는다 싶으면 인근의 차그레스 강이 범람해서 다 잠기기를 무한 반복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중대한 계획을 생각합니다. 첫째 모기를 박멸하자, 둘째 배를 산으로 올려서 통과하자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방역작업과 함께 공사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차그레스 강에 둑을 쌓아 호수로 만들어 버리고 양쪽 방향에 3단 갑문을 설치하여 배가 산을 오를수 있게 되었습니다. 6년 동안 다시 공사를 한 결과 미국은 10년간 6000명의 사망자로 공사를 성공 시키게 됩니다. 운하 개통 이후 뉴욕에서 출발한 배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거리는 이전에 22500km에서 9500km로 절반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파나마운하의 영향력
이로인해 전세계 무역에도 커다란 영향략을 미치게되어, 개통 이후 딱 두차례를 제외하면 운행이 중단된적이 없을 정도 입니다. 미 해군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자유롭게 오갈수 있게 되면서 1,2차 세계대전 양상에도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진주만이 일본에게 기습당했을때 만약 파나마 운하가 없었다면 더욱 큰 피해를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미 해군에게 있어서 파나마 운하는 큰 전략적요충지입니다. 미국이 건설했고 미국이 소유했으며, 주변땅은 미국 영토이었기 때문에 운하에서 나오는 수익도 미국에서 다 가져가며 큰 이득을 챙깁니다. 파나마에서 서서히 무국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파나마 운하 소유권 갈등
1959년 첫 폭동이 있었으며 1964년에는 훨씬더 큰 폭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8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게 됩니다. 미국이 아무리 강력한 나라여도 국제 사회의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냉정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자유진영 국가들 까지 비판을 가했고 결국 1979년 미국은 운하 자체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파나마에 반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나마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변함 없었고 1989년에는 반미 노선을 걸으며 부정 선거를 저지르던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제거하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해서 정권을 바꿔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오히려 이 침공으로 인해 오히려 남에밀카의 반미 민족주의 세력에게 더 큰 명분을 만들어 주게 됐고, 유엔에서도 공식적인 결의안을 채택해 미국을 비난하는 등 점점 더 눈치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결국1999년 공식적으로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반환하면서 운하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는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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